플레이아웃사이드가 여러분께 편지를 보내드려요. 정기적인 건 아니고, 저희가 보내고 싶을 때 보내드립니다. 하나의 주제를 정해 '베가본더', '오프리', '헤나'가 각각 한 편씩 글을 씁니다. 형식은 없고, 내용은 아무 내용일 것입니다. |
베가본더(Vagabonder)의 편지💌
"남영동"  | “동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은 남영동이라는 곳이다. 영화 “남영동1985”으로 알려진 곳이며 남영동에는 미8군이 주둔해 있기도 하다. 남영동은 부대찌개가 유명한 먹자골목으로 인근 동네에 비해 식당이 많은 곳이다. 작은 동네에 뛰어노는 애들은 몇명 없다. 그래서 남영동 애들은 다 알 수 있다. 놀이터 대신 은행 주차장에서 뛰어 놀고 공원 대신 제과회사 공조기를 가려둔 나무 밑에서 놀기 바빴다. 관리하시는 아저씨들의 호통이 쫓아올 때면 도망가기 바빴다. 그렇게 놀거리 없는 척박한 곳에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재미있게 놀까 스스로 연구하고 진화했다. 주말이면 문을 닫는 은행 주차장을 넘어가 차단막 레일을 이용하여 농구 골대 축구 골대 만들어 공놀이를 했고 제과 회사 주차장을 서바이벌장으로 활용하여 BB탄 놀이를 즐겼다. 고학년이 되면서 자전거를 타게 되면서부터는 남영동을 벗어나 근처 삼각지의 전쟁기념관과 용산 전자상가 그리고 서울역 뒷 염천교까지 진출하였다. 하지만 남영동도 개발의 변화를 맞이하며 하나둘 친구들이 떠나기 시작 했고 나 또한 그자리를 떠났다. 30년이 지나 남영동에 다시 찾으니 예전 살던 곳은 보이지 않지만 친구들과 놀던 곳은 볼 수 있었다.
어렸을 때를 떠올리며 생각해보면 우리가 놀 때 건물 관리하시는 분들을 제외하고는 어른들의 개입은 없었다. 우리 스스로 선택을 했고 그 선택에 만족 했다. 어른들의 도움은 필요치 않았다. 그 안에서도 규칙을 만들고 상황에 맞게 잘 대처하여 놀이를 즐겼다. 때로 서로 의견 차이로 인해 다툼과 삐침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시 우리는 놀기 시작 했다. 지금도 그때 같이 놀던 친구들 모두와는 아니지만 가끔씩 만나 놀고 있다. 하지만 예전처럼 뛰어다니며 놀지는 못한다. 지금은 몸도 마음도 생각도 커 버린 어른이라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그때 그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다. 휴대전화도 없던 시절 친구 집에 전화해서 받지 않으면 무작정 친구 집으로 달려가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놀았던 내가, 그리고 그 친구가 그립다.
지금 돌아보면 청소년들에게 놀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많이 변했다. 각자 휴대전화가 있으며 누구를 만나지 않아도 놀 수 있는 방식이 생겼다. 그것이 좋거나 혹은 나쁘거나 그런 문제가 아닌 시대가 바뀌면서 문화도 바뀐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이제는 모이기 위해 어른이 필요하고 놀기 위해 어른들이 규칙을 정해줘야 다툼이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다툼이 생기면 청소년 스스로가 아닌 어른들이 중재를 한다. 어른은 늘 가르치지 않으면 불안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나는 어른이고 싶지는 않지만 점점 예전에 내가 바라보던 재미없던 어른으로 변해가는것 같다.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많아지고 생각이 많아진다. 그냥 바라봐주는 것! 그것이 정말 힘들고 불안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청소년들이 스스로 자신의 삶을 영위 할 수 있는 기회와 그리고 그것을 선택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내가 필요 할 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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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나(Hena)의 편지💌
"도시를 떠나고 싶은 29세 여성" 올해 초 까지만 해도 내가 다니는 회사는 교통의 요지 공덕에 있었다. 서울 지하철 정중앙이기도 하고 4개의 호선이 다녀서 어디로든 이동하기 편했다. 처음 입사할 때는 그렇게 번화한 곳인지 알지 못하고 갔다. 면접 보던 날에도 근처에 높은 빌딩이 많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면접 자체에만 집중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근처에 일하거나 살고 있는 친구들이 많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가끔 만나 밥을 먹고 웃다 헤어지고는 했다. 바로 앞에 경의선 숲길이 있었다. 효창공원부터 이어진 산책로는 공덕역 큰 도로에서 한번 끊겼다가, 가게들이 슬금슬금 모여있는 어느 출입구로부터 다시 시작된다. 그렇게 시작된 길에는 벚꽃도 피고 낙엽도 지고 화사한 바람도 자주 불었다. 날씨좋은 날에는 퇴근 하고 길을 따라 쭉 걷기도 했다. 길의 마지막은 가좌역인데, 서강대와 연남동을 지나 가좌에 다다른다. 입사 초에는 우리집이 망원동이었고 친구네 집도 연남에 있어 자주 걸었다.
공덕동 직장인들은 열두시 삼십분 경 부터 점심식사를 한다. 내가 다니던 회사는 점심을 열한시에 먹었다. 이른 시간이라, 밖으로 나오면 사람이 정말 없었다. 평화로운 낮시간에 큰 건물 사이사이를 걷는다. 월, 수, 금요일에는 다같이 식사를 하러 간다. 우리가 가는 식당은 정해져있다. 팔천원에서 팔천오백원 사이, 한 사람당 메뉴 하나씩 주문할 수 있는 곳, 밑반찬이 꽤 자주 리필되고, 사장님과 직원분들이 친절한 곳, 식사하러 오기 전에 전화로 예약할 수 있는곳, 자주 와도 물리지 않는 곳. 공덕역 일대를 다 털어서 일고여덟쯤 된다. 옹심이메밀칼국수, 수제비, 순대국, 낙지볶음, 닭갈비, 만두국 - 결과적으로는 모두 대표님의 입맛에 맞게 한식으로 귀결되었다. 사실 내가 한식을 좋아한 것도 있었다. 집에서는 도저히 밥을 먹을 수 없었다. 3.5평 짜리 방에 딸린 부엌에서는, 야채를 손질할 엄두도 잘 나지 않았으니까.
퇴근하면 지하철 5호선을 타고 서쪽으로 향했다. 집이 신정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집은 작은 원룸이었고, 내가 처음으로 맞이한 혼자만의 공간이었다. 옛날에는 이 동네를 은행정이라 불렸다고 한다. 매일 출퇴근 시간마다 신기할 정도로 같은 사람들을 마주쳤다. 신정은 나와 같은 1인 거주자가 밀집된 곳이다. 공덕에서 해방된 이삼십대 청년들은 일제히 나와 같은 열차를 타고 신정에 내렸다. 신림이나 대학가 만큼 많지는 않아도, 깨끗하고 반듯한 빌라가 꽤 있다. 간간히 오래 된 밥집들과 편의점, 버스정류장, 그리고 가끔 코인노래방이 있다. 지하철을 나오면 아주 큰 마트와 헬스장이 보인다. 지하철 출구를 나오자마자 뿔뿔히 흩어지는 청년들, 그들이 어쩌면 밤바다 노래를 부르는 아랫집 사람일 수도 있지. 아니면 내 택배를 잘 못 가져간 앞집 사람, 그게 아니면 비어있는 그 집을 보러 구경온 사람일수도 있지. 아무튼 그들과는 또 어디서든 만날 것이다. 우리는 동네를 공유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집으로 갔었다.
그러던 중에 이직을 했다. 오랫동안 하고 싶었던, 책 만드는 일이다. 파주에 출판단지가 조성되어 있어 살림을 아예 옮겨버렸다. 입사 전날에 이사를 해버린 나를 보고, 친구와 동료들은 물론 가족들도 혀를 내둘렀다. 사실 책을 만들고 싶은 것이 먼저였는지, 서울을 벗어나고 싶은 것이 먼저였는지 잘 모르겠다. 나는 도시의 삶에 완전히 적응한 10년차 자취생이면서도, 매일 도시를 떠나고 싶은 현대인이기도 했으니까. 출판단지에서 집까지는 버스로 20분, 걸어서 45분 정도 걸린다. 출근할 때는 버스를, 퇴근 할 때는 도보를 이용했다. 인파로 북적이는 지하철을 타지 않아도 되는 것이 우선 좋았고 노을 지는 하늘을 보면서 걷는 것이 좋았다. 언젠가는 지름길을 발견했다. 포장되지 않은 흙길을 밟고, 좌우로 펼쳐진 논밭을 살피면서 걷는 것이다. 비오는 날에는 달팽이와 지렁이가 땅 위로 올라왔다. 흙냄새와 풀냄새도 함께. 총총총 사뿐히 뛰는 참새도 있지만, 논에서 벌레를 쏙쏙 빼먹는 물새도 있다. 집으로 가는 한시간 동안 사람은 거의 마주치지 않는다.
논밭을 지나 도착한 우리 동네에는 아이들이 많다. 서울에서는 교복 입은 사람들을 보기가 정말 힘들었는데, 다들 어디 학원에 들어가 있어서 나와는 동선이 겹치지 않았던 모양이지. 그런데 우리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와 도서관 뒷길 산책로에서는 꽤 자주 마주친다. 나는 나의 십여년 전을 떠올리며 그들을 반가워 하기도 하는 것 같다. 지나간 시간과 옛친구들에 대해 생각한다. 고향인 부산에 사는 친구들은 일년에 한두번 볼까 말까 하고, 서울에 사는 친구들을 만나려면 집과는 반대 방향으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한다. 하지만 괜찮다. 이제 나는 친구들을 매일 만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어른이 되었으니까. 그래서 평일에는 더이상 약속을 만들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을 원했는지도 모른다. 혼자 있을 수 있는,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시간. 나는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글쓰기 말고, 요리. 순두부와 된장과 고추장으로 만들 수 있는 온갖 찌개를 끓이고, 호박을 굽고 감자를 찌고 버섯을 볶는다. 맛 좋은 토마토를 큼직하게 썰어 파스타면에 함께 뒤섞는다. 한껏 배가 불러지면 저녁에는 산책을 한다. 멋진 어른들의 에세이를 읽고, 가끔 혼자 노래도 부르고. 동네에서 보내는 이런 일상이 멋있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나의 반경을 지켜가는 일이, 나만의 울타리에서 안온한 일상을 꾸리는 일이. 더욱 풍성한 세계를 만드는 일처럼 생각된다. |
 | 경기도 가평군 북면의 작은 동네 ‘이곡리’에 살고 있다. 가평 읍내에서도 차를 타고 북쪽으로 십오 분은 달려가야 나오는 산속 마을이다. 저녁 일곱 시만 넘으면 인적이 드물고 도로에 차가 없어 마을은 아주 한산하고 조용하다. 사람도 차도 아무도 없는 자유를 느끼며 텅 빈 도로를 활보하는 일탈은 자못 짜릿하다. 이런 마을이 주말만 되면 인파로 가득하다. 이 작은 동네에 무엇 볼 게 있다고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와 도로는 차로 가득하다. 우리 동네에서 잠깐이면 갈 수 있는 읍내까지 한 시간도 더 걸릴 만큼 차는 거북이걸음을 한다. 이럴 때 나는 동네 사람이어서 마을 뒷길로, 개울가로 차를 이리저리 몰아 평소와 같이 읍내에 사뿐히 다녀올 수 있는데, 멈춰선 차들을 보며 묘한 쾌감을 느끼기도 한다. 주말이 지나가면 우리 동네는 다시 평온한 일상을 되찾는다. 아침 다섯 시만 되면 개 짖는 소리, 새 푸드득거리는 소리, 철문 여는 소리, 수레 끄는 소리, 기계 돌아가는 소리에 절로 눈이 뜨인다. 더 자고 싶어도 더 잘 수가 없어 간단하게 채비를 하고 밖으로 나가는 순간부터 나는 완전 동네 사람이 된다. 그야말로 동네에 사는 사람. 동네에서 만나는 어르신마다 누군지 몰라도 인사를 하고, 어르신도 당최 누군지 모르는데 낯만 조금 익은 사람에게 인사를 받는 그런 광경이 매 순간 매 골목마다 반복된다. 오늘도 집을 나서고, 머리가 곱슬거리고 분홍색 외투를 걸치신(우리 마을 어르신들은 웬만하면 이런 꾸밈이시다), 언젠가 뵌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할머니께 “어이구 어디 읍내 가셔요”하고 말씀을 건네며 버스정류장을 지나온 참이다. “예, 오늘 5일장 열려요. 마침 살 게 있어서”하고 화답을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 이 동네에서 나는 다섯 아해와 같이 살고 있다. 모두 도시에서 살다가 저마다의 사정으로 여기 이곡리로 온 아해들이다. 어린 나이에도 가평의 산세만큼 인생사가 기구한 아해도 있다. 넉넉한 시골에 살며 마음에 난 생채기가 조금씩 아무는 중이다. 나는 언제부턴가 이들을 ‘이곡리 5형제’라 부르고 있다. 물론 아해들은 이 호칭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가 무슨 형제냐며. 이 아해들은 우리 동네에서 길게는 두 해를, 짧게는 넉 달을 살았다. 문득 쟤들의 동네는 어디일까, 여기를 ‘우리 동네’라고 여기기는 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곡리가 집처럼 편안해진 건 여기에 오고 일 년쯤 지나서였다. 읍내에서 이곡리로 들어오는 길이 늘 음울하게만 느껴지더니, 일 년쯤 되는 어느 날 노루목고개를 넘으며 보이는, 저 멀리 펼쳐진 우리 동네의 풍경이 한없이 편안하게 느껴졌었다. 아, 이제 여기가 우리 동네, 우리집이구나. 잠옷만 걸치고 때로는 웃옷도 벗어던지고 서슴없이 동네를 누비는 아해들을 보면, 쟤네는 이미 여기 동네 사람이구나 싶다. 지난 겨울, 몇 안 되는 우리 동네 고양이가 개울에 빠져 얼어죽었을 때에도, 어디에서 왔는지 담비가 비닐하우스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언 채로 엎드려 있을 때에도, ‘우리 동네 짐승들’이라며 우리 아해들이 정성껏 장사를 지내주기도 하였었지. 우리 동네를 향한 아해들의 마음은 어쩌면 누구보다 각별한 것 같다. 동네 곳곳에서 이따금 전해오는 아해들 소식을 들으며 하루를 산다. “오늘 애들이 안 보이고 조용하네, 어디들 갔는가” (예, 다들 도시에 있는 집으로들 갔어요)
“요즘 J가 학교에서 얼마나 잘 지내는지 몰라요” (고마운 소식이네요, 선생님께서 애쓰신 덕분입니다)
“아까 울면서 저기 학교 쪽으로 들어갔어” (감사합니다, 제가 가볼게요)
“그 곱슬머리 친구가 아주 의젓해졌던데!” (아, W요? 그쵸. 작년만 해도 천방지축이었는데)
“통통하고 하얀 아이 있잖아요, 여기 카드 놓고 갔어요. 챙겨주세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동네 사람들 모두가 알게 모르게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오죽하면 동네분들을 걸어다니는 CCTV라고도 할까)이 부담스러울 때도 없지는 않지만 동네에서 나와 함께 사는 아해들 소식을 전해 들을 때면 나와 아해들 모두 ‘우리 동네’라는 안전한 울타리 속에서 지낸다는 아늑함이 물씬 느껴진다. 아무쪼록 여기가 내게는 좋은 동네다. 앞으로도 만나는 분마다 고마운 마음으로 인사 잘하고 다녀야겠다는 생각이다. 아는 분이건 모르는 분이건. 모두가 나와 아해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네 사람들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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